허망함의 대가, 이안 뱅크스

제목이 왠지 그럴듯한 이안 뱅크스의 "플레바스를 생각하라"는 그의 SF 시리즈 "컬쳐"의 첫 장편이다. 그 후로 여러 편의 이야기를 썼는데, 르귄의 "헤인"시리즈 처럼 먼 미래의 우주를 배경으로 다양한 종족들이 등장하곤 한다. 시리즈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도 있는 "컬쳐"는 지구인들이 우주로 진출하면서 세운 연합체, 혹은 국가인데, 첫 느낌은 "아브"를 떠올리게도 한다. 하지만, 영국의 SF는 일본식과도 다르고, 미국식과도 다른 것이, 미래의 인간들이 인간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경우가 별로 없다. 닥터 WHO를 본 사람은 좀 알겠지만, 인간의 모습이 먼 미래에도 똑 같이 존재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편견. 이안 뱅크스는 그걸 철저히 적용한다. 물론, 인간의 모습을 한 캐릭터들도 꽤나 많이 등장하지만, 여러가지 사정으로 다양한 모습을 가진, 마치 총몽의 로봇들의 좀 더 기괴해진 버전을 생각해보면 적당하겠다, 캐릭터들도 많이 등장한다. 하여간, 뱅크스는 좀 특이하긴 하다.

컬쳐가 왜 아브랑 비슷한 느낌인가. 컬쳐는 아브와 비슷하게도 사사로운 정 따위는 무시한다. 우주의 정의, 평화, 그리고, 균형 따위가 그들에겐 매우 중요한 가치이고, 이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다. 컬쳐 또한 고도로 발달한 과학을 바탕으로 사실상의 영생이 가능하다. 모습을 바꾸는 것도 쉬운 일이라 외면의 아름다움은 문제가 안된다. 거의 모든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도 비슷하다. 하지만, 비슷한 것은 거기에서 그친다. 일단, 아브식의 왕정체제 따위는 없다. 좀 더 복잡한 형태를 가진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컬쳐에 소속된 개개인의 인권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컬쳐는 사실상 인간이 지배하는 국가라기 보다는 AI와의 협력을 통해서 지배하는 국가, 연합체라는 점이다. 컬쳐는 뛰어난 과학으로 새로운 종족이라고 할 수 있는, 터미네이터의 세계관처럼 기계가 기계를 재창조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므로, AI를 탄생시킨다. 그리고,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의 파티마와 비슷하게 컬쳐는 그 AI와 협력하여 그들의 일을 수행한다. 그 AI들이 말 그대로 기계의 형태를 하고 있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은 역시 양놈들 센스라며 혀를 찰지도 모르지만(AI로 늘씬한 미녀와 미남들을 만들어낸 FFS의 세계를 떠올려보라.)

이 정도 설정으로 이미 충분히 매력적인데도, 뱅크스는 한 발 더 나아간다. 르귄이 인류학의 성과를 SF에 적용하여 아름다운, 그리고 서정적인 세계와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면, 뱅크스는, 말벌 공장에서 이미 눈치 챈 사람이 많을 테지만, 매우 악랄하게 인류학의 성과를 소설에 적용한다. 플레바스를 생각하라에서 호르자가 식인 무리들에게 잡혀서 겪는 고통은 그걸 명확하게 대변한다. 그에겐 자비란 없다.또한, 그가 만들어 내는 스페이스 콜로니나 우주 정거장 같은 것도 독특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의 상상력은 건담에 나오는 콜로니에 머물지 않고, 그가 만들어낸 세계는 라마류의 신비함마져 가지고 있다. 어쨌든, 그가 만들어내는 공간은 진정 새로운 세계처럼 느껴진다. 톨킨도 그것에 불만을 품지는 못할 정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계를 구성하려는 그런 부단하고, 대단한 노력 탓인지, 플롯 자체는 조금은 맥이 빠질 정도다. 그는 뭔가 말하고 싶어한다. "플레바스를 생각하라"에서는 아마도, 대의명분의 허망함 따위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플레바스를 생각하라의 호르자의 고난과 죽음은 매우 허망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것이 뱅크스가 원하는 것이라면 따라야 하겠지. 그런데, "MATTER"도 왠지 그런 분위기가 나서 불안하다. 수 억광년을 날아가서, 고생하다, 죽었어요. 인생이 원래 그런것 아닌가요, 전쟁이 원래 그런거 아닌가요라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by corwin | 2009/11/23 13:49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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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Adella at 2009/11/23 14:35
그런 작가란 말이죠. 읽기 두려워지는;;
Commented by gracky at 2009/11/23 23:29
Matter도 매우 맥거핀 플롯이긴 하지만 플레바스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Matter의 엔딩은 상당히 감상적이고 유머러스하면서 어떤 면에서는 긍정적이죠. 물론 Banks 식으로 그렇습니다만... 플레바스도 물론 좋은 작품이지만 어느 정도 미숙함이 없어지지 않은 데뷔작이라는 인상이 들고, 지금까지 읽은 컬처 작품들 중에서 플롯의 면에서 최고작은 단연 Use of weapons, 읽기 쉬운 점에서는 The player of games 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컬처 시리즈를 팔기 위해서는 처음 이 둘 중의 하나를 도입했다면 더 낫지 않았을지 라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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