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하루가 갔다.

백수가 바쁘면 뭐가 바쁘겠냐만 아무래도 어쨌든 늦게 일어나고 늦게 자다보니 뭔가 공식적인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시간이 다른 사람들보다 짧은 건 사실이다. 하여간,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 나가야 했었는데, 나가려고 보니 아침을 안 먹었다. 그렇다고 아침을 제대로 챙겨 먹고 나가자니 시간이 너무 걸리고 해서 바나나 하나 베어 물고 백수 둘이서 길을 나섰다. 곧 먹을 점심을 뭘로 먹어야 제대로 먹을까 서로 이야기하면서. 물론, 이 주제는 우리의 대화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평소에는 내가 양식을 주장하고, S가 설렁탕을 주장하는 식이었는데, 어제 밤 늦게 잠이 안와서 혼자 매실주를 좀 들이키고 잤더니 왠지 국물이 먹고 싶어서 나는 갈비탕을 주장했다. 운전 하던 중에 갈비탕 괜찮은 곳을 찾아 한 참을 머리를 굴리다가 학교 앞의 거구장을 한 번도 못 가봤다는 생각이 들어 그리로 향했다. 그리고, 거구장에서 후진 주차하다가 기둥에 부딛혀 사이드 미러를 뽀개먹었다.

젠장. 조낸 비싼 갈비탕 먹게 생겼군 하고 생각하면서 갈비탕과 설렁탕을 먹었는데 머리 속에선 어떻게 이 사건을 동생에게 들기지 않고 덮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얼마전에 공무원이 된 탓에 집안에서 위세가 대단한(물론, 별 볼일 없었을 때도 위세가 당당하긴 했다.) 그 잔소리꾼에게 이번 사건이 걸리면 곱게 안 넘어가리라. 그래서, 밥을 먹고 나서 자동차 센터에 전화를 걸었더니 7만 8천원이 나온다고 하더라. 그나마 그 정돈인 걸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하지만, 백수들에게 이런 공돈지출은 그야말로 눈물의 타격이다. 하여간, 차를 세워놓고 일단 일 처리 하러 학교에 들어갔더니, 점심시간이니 3시에나 오랜다. 오늘 왜 이래...생각하면서 밖으로 나와 카센터로 차를 몰았다.

카센터 직원이 "아현을 지나서 애오개쪽으로 오시면 바로 보입니다."라고 하길래 아현을 지나갔다. 고가도로 위로. -_-; 아현을 지나서 충정로를 지나서...-_-; 이 길은 학창시절 조낸 자주는 아니더라도 꽤 자주 다녔는데, 이 길 중간에는 분명히 애오개는 없다. 그래서, 유턴을 하고 이번엔 고가도로 밑으로 아현을 지나다 마포대교 쪽으로 갔다. 그제서야 보이는 애오개 역. 하지만, 이번엔 카센터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나가버렸다. 카센터를 너무 늦게 발견했기 때문에. 물론, 왼쪽 사이드미러가 없어 제대로 운전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보지만 하여간 카센터를 한참 지나서 다시 유턴을 하고, 다시 유턴을 해서 카센터에 골인.

차를 "정박"하고 내리니 사람좋아 보이는 직원이 와서 카키를 달라고 한다. 40분 정도가 걸릴 것 같다고 해서, 수리 끝나면 연락달라고 전화번호 적어주고나서 시간을 떼우러 근처 스타벅스에 갔다. 몇 십분전에 차 수리하는 동안 뭐해야 하냐는 S에게 애오개에 뭐 별 것 있겠냐고 나도 모르겠다고 했었는데, 애오개엔 낙성대엔 없는 스타벅스가 있었다. 길 건너편엔 빈스빈스 짝퉁인 듯한 빈스벤치도 있고. S가 비웃었다. 그렇게나 무시하더니 애오개가 봉천동보다 낫네. 유구무언이로세.

하지만, 이 놈의 스타벅스엔 읽을 꺼리가 없었다. 다른 스타벅스엔 책이 잔뜩 있는데! 그런데, 스타벅스의 원두는 어디서 오는가 따위가 놓여 있는 팜플렛 선반 위에 뭔가 다른 놈이 하나 있는 것을 발견. 읽어보니 구글이 스타벅스에 무료 wireless를 지원한다고 써있는 팜플렛이 아닌가. 아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이걸 왜 구글이 제공하냐고. 스타벅스가 제공하는게 아니고. 뭐 하여간 구글짱 먹으셈 최고얌,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떼우고 있는데, 어디서 어정쩡하게 미인인 듯한 여자가 어정쩡하게 사진사인듯한 사람과 나타나더니 어정쩡하게 쇼핑몰 주인인 듯한 사람이 스타벅스 점원에게 허락맞는 사이에 우리 바로 옆에서 연출 사진을 찍는다. 덕분에 그나마 옆에서 어정쩡하게 시선 돌리다가 그들이 사라지고 우리도 나섰다. 연락이 오지 않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그런데... 카센터에 도착해보니 직원이 다짜고짜 묻는다. 카키 저한테 주셨어요? 그 소리에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열쇠가 내 손안에. 어익후 이런. 직원은 30분동안 수리도 못하고 열쇠 잊어버린 줄 알고 찾아다녔다고 한다. 오늘 내 정신이 내 정신이 아냐. 죄송하다고 죄송하다고 옆에서 나 대신 S가 말하는 사이 난 반쯤은 실성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계산 하는데 역시나 사람 좋아 보이는 직원이 통장 비슷한 걸 만들어 준다. 차계부라고, 차의 수리 내역을 기록해주는 수첩 같은 것인데, 그 맨 위에는 "사이드미러"라고 선명하게 박혀있다. 나는 그것을 받아 주머니에 넣으며, 절대로 아버지나, 동생에게 들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현대자동차서비스의 거대한 서버 어딘가에 남아 있는 자료는 어떻게 지우나 젠장.)

그렇게 하루가 갔다.
by corwin | 2008/12/17 21:07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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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게드 at 2008/12/18 09:48
ㄷㄷㄷ 동생이 무서워서 하루가..
Commented by su at 2009/01/08 14:15
아, 파란만장한 하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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