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소장님은 비주얼 베이직을 좀 할 줄 아는데, 이를 이용해서 작년에 재미있는 어플리케이션을 하나 만들었다. 사원들의 업무기록시스템이 바로 그것. 이 어플리케이션은 각 사원들은 이를 통해 자신이 하루 동안 어떤 일을 했는지 시간 단위로 기록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 프로그램을 배포한 뒤로 전 사원에게 이를 사용하라고 했었다. 그래서, 한 동안, 아마 3개월 쯤?, 모든 사원들이 하루에 30분 이상씩 오늘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기록해야 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물론, 윗분들은 사원들이 기록한 것을 찾아 볼 수 있고...
그래서, 나 같은 사람에겐 이 넘이 애물단지였다. 프로젝트 말기의 아주 바쁜 때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시간을 농땡이질하면서 보내는 나 같은 사원은 매일매일 채워 넣을 내용이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를 채워 넣기 위해서라도 일을 만들어야 했고, 없는 일을 만드는 건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 팀의 팀장은 나와 반대의 사람이었다. 시간이 남으면 일을 만들어서 하는 스타일이었고, 이 때문에 이 시스템을 매우 좋아했다. 그리고, 우리가 쓰는 것을 매일 검사했고, 시간이 남는다 싶으면 새 일을 주곤 했다. 회사와 상급자들의 시선에서 본다면 이는 매우 훌륭한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도입한 후 몇 달 뒤에 회사가 입주 해 있는 건물 전체에 정전이 있었다. 이 때문에 이 프로그램이 접속하는 서버는 중지 됐었고, 지금까지 실질적으로 이 시스템은 다시 가동되지 않고 있다. 팀장은 작년 말에 해외 사업과 관련된 출장과 일 때문에 바뻐서 이 시스템에 신경을 쓰지 못했고(당연히 자신도 사용하지 않았다.), 사원들은 아무도 쓰라고 하지 않았고, 접속할 수도 없으니 더 이상 이 시스템을 찾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사원들은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는 예전처럼 하루에 8시간 농땡이를 치기도 한다. 회사 입장에서 보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스템이란게 이렇다. 겉보기에 아무리 그럴듯한 것처럼 보여도 사용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누군가가 유지/보수 하지 않으면 시스템은 금방 사라지고,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재와 공공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어떤가. 그들을 위한 어떤 시스템이 존재했다고 쳐도(기사들을 읽어보니 없었던 것 같다.), 우리의 인식 수준을 생각해볼 때 숭례문 사건은 언제고 능히 일어날 수 있었던 사건이라고 보는게 옳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숭례문은 다시 지을 수 있지만, 없는 시스템을 만들고 유지하는 건 그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